지난 1월 중, 친구들로부터 꼭 한번쯤은 봐야 할 전시회가 잠실 롯데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 함께 언제쯤 가는 게 좋을까 각을 세우던 중에 모처럼 일이 좀 한가해진 이번 주말을 노려서 갔다왔다.
결론적으로 엄청나게 만족스러운 전시회였다. 카즈미 아라카와라는 일본인 개인의 소장품들이라고 해서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그리스, 로마 시대 ~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한 양의 고퀄리티 작품들만 수백점이 모여 있는 모습에 2시간 내내 정줄을 놓고 미친듯이 구경했고, 심지어 전시회장을 빠져나오면서도 나중에 혼자서 한번 더 방문할까 하는 미련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기억이 맞다면 아마 기원전 그리스 시대의 금목걸이와 귀걸이 장신구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이아몬드며 사파이어 등의 보석을 박아놓은 것들 보다는, 순수하게 금으로 장인이 섬세한 기교를 부려 만든 작품들이 훨씬 좋았다. 현대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고대 장인들의 센스 + 저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낌없이 자본을 투자할 수 있었던 고대 권력자들의 재력과 까다로운 심미안을 보여주는 물건들이라...

카넬리안(홍옥수)로 만든 카메오. 왠지 모르지만 엘든링의 라이라이커커드 해병님...이 아니라 라이커드의 약탈의 초상화가 생각나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현대에 카메오라고 하면, 조개껍데기나 아게이트 등을 깎아서 만든 제품들을 떠올리는데, 과거 사람들은 그거 외에도 홍옥수,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등을 다양하게 활용해서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서 매우 흥미로움

위에서 말했던 대로 이건 사파이어로 만든 카메오

용 모양 장식이라는데, 위엄있다기 보다는 그냥 에메랄드와 그 외 보석을 코팅한 날개달린 공룡 같기도 하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카메오들처럼 동일한 느낌의 작품들이 아니라, 카메오 하나 하나마다 다양한 모양과 테마가 존재한다는 것이 경이롭다.
특히 예수뽀이가 탄생한 이후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하는 모습을 카메오로 조각한 위의 작품은, 그 부서지기 쉬운 조개껍데기를 어떻게 저렇게 매끄럽게 다듬었는지 존경심이 생길 정도다.




같이 갔던 사람들... 이 십자가들의 앞면만 보고는 단순히 예쁘다고만 했다가, 뒷면을 보는 순간 일제히 감탄하더라고
앞쪽은 금과 다이아몬드를 처바른 돈지랄한 장식 십자가에 불과한데, 사실 뒷면에 그려진 그림과 에나멜 세공이 더 멋지더라

이건 예카테리나 황제의 카메오!! 에메랄드 역시 조개껍데기 이상으로 부서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때론 다이아몬드 이상의 가치를 지니기도 하는 보석인데 거기다 카메오를 새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많은 에메랄드들을 날려먹었을까 심히 궁금해진다.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잎사귀와 꽃 모양의 장신구 세트

이거 몰타 기사단장의 문장이라고 하더라. 흠좀 간지


우리 일행들의 발모가지를 쫀득찐뜩 찌인득하게 잡아당기는 물귀신과도 같은 마력이 있던 이번 전시 최고의 컬렉션 루미니 후작부인의 파뤼르
파뤼르란 쉽게 말해서 보석 세트인데, 저 장신구 세트에 쓰인 보석들 자체는 오늘날에는 그리 큰 가지를 지니지 않는 핑크 토파즈와 아쿠아마린 등이지만 그 섬세함과 화려함에 있어서 여타 파뤼르 세트를 압도하는 작품이다
사진에서는 묘사되지 않아 안타깝지만, 전시장에서 일부러 저 파뤼르의 머리장신구들이 가볍게 흔들리게 만들어 놨는데, 실제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아서 루미니 후작부인이 저걸 착용한 모습을 실제로 봤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상상하게 되더라고


그리스 시대의 금 세공 기술은 세계 제이이이이일

이거 고혹의 보석 · 매혹의 시간 포스터에도 붙어 있던 메인 작품 중 하나인데, 나비와 요정의 모습을 결합시킨 브로치




티아라 컬렉션들도 엄청 많은데, 사실 일반적인 모습의 티아라들 보다는 보리 이삭, 날개, 별 모양 등등의 특이한 티아라들이 더 끌려서 그것들을 집중적으로 찍음
개인적으로 첫번째 백금 + 다이아몬드 보리 이삭 티아라가 제일 멋지더라.
전시회를 보고 난 후, 어떻게 개인이 전 시대를 아우르는 보석 컬렉션들을 수집할 수 있었는지 그 비하인드 스토리에 많은 궁금증이 생긴다. 이 보석들을 수집하는 데 든 비용만 6600억원 상당이었다는데, 카즈미 아라카와가 어떤 인물이기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도...
다음번에 혼자서 한번 더 갈 기회가 생긴다면 도슨트 진행 시간에 맞춰서 가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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